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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동행하십니까?
  • 설교일2020-09-16
  • 성경본문창 5:21-24
  • 설교자김성일목사
설교게시판 내용
본문내용

누구와 동행 하십니까? 5:21-24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난 후 두 병사가 고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두 병사는 살아서 고향에 간다는 기쁨에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문득 언덕에 있는 성당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한 병사는 교회에 들어가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했고, 한 병사는 교회는 무슨 교회냐고 그냥 술이나 한잔 마시고 가자고 했습니다

결국 두 병사는 자기식대로 했고 몇 십 년이 흘렀습니다.


술이나 먹자고 한 병사는 귀향 후 술로 세월을 보내다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신문을 보다 깜짝 놀랐는데 그것은 미국의 22대 대통령에 클리브랜드가 당선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클리브랜드는 전쟁 후 자신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다 교회에 가자고 했던 전우였던 것입니다.


바로 신앙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 그리고 주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이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노래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 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1:1-3)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요구하십니다. 주님이라는 가치를 선택하고 주님께서 동행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456: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1) 의합해야 :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아모스3:3)했습니다.

동행하기 위해서는 주님과 의기투합 즉 방향, 목표가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와 주님 사이의 우선되어야 할 뜻과 의지는 당연히 주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신 가장 근본적인 방향과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인간 움직일 수도 반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을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비로소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2;7의 생령이란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진흙덩어리인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 생기 곧 성령을 불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생명이요 생기요 성령이며 구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요 10에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또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37)

 

37장을 살펴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불러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얘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 당시 뼈는 말랐고 심히 많았습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던 예언자는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에게 대언하라 하셨고 대언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뼈들이 일어나 소리가 나게 들어가 붙고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아직 생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생기에게 대언하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 이 사망을 당한자에게 불어 살게 하라.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언하였더니 사망을 당한 자들이 일어나 서게 되는데 극히 큰 군대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원. 인구, 또는 기술이나 문명이 아니었습니다. 사망을 당한 자, 말라비틀어진 수북한 뼈에 하나님의 말씀과 생기로 인해 생명 넘치는 군대로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뜻과 의합할 때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삶의 자리에서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동행하기 위해서는 보폭과 속도도 같아야 합니다. 주님보다 빠르거나 늦어서는 동행할 수 없습니다. 국군의 날 행진 장면을 보신 적 있으시지요? 과거에는 몇 달 동안 여의도 공원 등에서 훈련하되 보폭을 맞추기 위해 실로 묶고 연습에 연습을 합니다. 보폭을 같이 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은 영혼 구원의 뜨거움으로 가득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움 외에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속도가 같아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 16장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던 아시아 전도의 문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밤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마게도니아 사람이 손짓하며 도와달라고 부르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유럽에도 복음을 전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중에 적지 않은 부분에 있어 성령보다 주님의 뜻보다 앞 설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복음과 사랑이라는 명분 하에 주님보다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 설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네가 버리고 가는 로마를 향해 또 다시 십자가를 지고자 가노라는 주님의 탄식과 눈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주신 지상명령이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19-20) 주님의 공생애를 사시면서 가지셨던 큰 관심은 생명이요 구원이며 승천하시는 주님의 가장 큰 관심은 제자의 삶이었습니다.

 

제자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성숙의 기준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제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단번에 믿음으로 태어나지만 제자는 훈련받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은 자아를 이겨야 하고 본능을 극복해야 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혹독한 포기를 요구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현실에 머물고 안주하려는 삶에 익숙하게 학습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훈련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강한 훈련만이 군사를 용사로 만들고, 성도를 성자로 만듭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그리스도인의 부재가 아니라 제자의 부재에 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인은 있지만 제자가 절대 부족하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무리들이 주님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무리들은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고 기적을 체험하면 되었습니다. 그들은 포기할 것도 놓을 것도 책임질 것도 없으며 갈릴리 바다 풍랑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포기해야 했고 버려야 했고 떠나야 했고 죽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12제자 중에 사도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되기 위한 훈련은 아무데서나 받을 수 없습니다. 응접실에서 사격연습을 하겠는가? 침실에서 산악훈련을 하겠는가? 서재에서 생존훈련을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정하신 훈련장소는 '광야'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종을 옮기듯이 금방 가나안에 들어가 편히 살기를 소망하였고 그렇게 믿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훈련방식은 자원입대가 아니라 선발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훈련소에서 훈련시키고자 하는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오직 주 만을 바라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포기하는 영성입니다.

광야에는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더 많고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이 더 많습니다. 희다 절망이 더 친숙한 곳이며 기댈 곳도 바라볼 곳도 숨을 곳도 의지할 만한 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춥지 않으면 덥고 외부의 공격에 늘 긴장해야 하고 늘 목마르고 늘 배고프고 늘 생존을 걱정해야 합니다. 물론 반석에서 샘물 나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를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음식을 40년 먹어야 하는 고난도의 훈련이며 오직 생존을 위해 구름기둥과 불기둥만 따라가야 하는 견디기 힘든 훈련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훈련 만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이 포함되어진 창 5장은 시간적으로는 160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32절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도 일정한 규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더라는 내용입니다. 5장의 에녹에 대한 기록에서 유독 눈에 띄는 기사를 읽을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에녹, 그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지만 전 후의 다른 이들과 달리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에녹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가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기록을 보면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입니다. 므두셀라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지만 에녹이 그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에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창던지는 자입니다. 고대 사회에 성을 지키는 사람 중에 성 벽에서 창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창던지는 병사들만 없으면 성을 점령하기 쉬울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저가 죽으면 점령하리라 심판하리라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많은 이들은 추론하기를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 그 이름을 창던지는 자 곧 그가 죽으면 심판하리라는 이름으로 므두셀라 라고 짓도록 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허구만은 아니어서 므두셀라가 죽던 해가 노아의 홍수가 시작되던 해였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의지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지만 특히 자녀 교육에 관련된 부분은 더욱 그러합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은 아들로 인해. 자녀로 인해 주님 앞에 꾸준히 무릎 끓지 않을 수 없는 자녀라는 광야에서 훈련되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루이스는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 때에는 속삭이시고, 기분이 안 좋을 때에는 양심에 조용히 말씀하시지만, 고통 중에 있을 때에는 고함을 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다.”이라고 외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로 업그레이드 되어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결국 고난이란 우리에게 방향을 바꾸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손을 난로에 대었을 때 뜨거운 고통을 느낍니다. 그 고통은 난로에서 손을 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난로에 손을 대고 있다면 우린 곧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을 아무에게나 무조건적으로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자신 있었는데.. 잘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반드시 될 줄 알았던 그 일에 걸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그 문제를 통해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일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방향과 같은 것인지. 주님의 속도와 같은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다서 14,15(398)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는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팍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함이라." 에녹은 예언자였습니다. 문제는 노아가 아무런 이상도 없고 하늘이 청정하기만 한데 홍수가 올 것이라고 배를 짓고 있었던 모습처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을 평안함을 가장한 시대를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했던 것입니다.

므두셀라의 출생 이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에 대한 선포하며 살았던 예언자 에녹! 그의 삶 자체가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안일과 거짓평화와 타협하지 않은 주님의 뜻에 합한 삶! 이를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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